피겨 스케이팅

피겨 스케이팅

Figure Skating

빙상경기의 기원

서구식의 스케이트가 한국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한국 전통 스케이트로 짚신 바닥에 대나무 쪽을 댄 ‘대발’이라는 것이 있었다. 겨울이면 얼음이 언 한강이나 대동강의 양기슭에 대발막을 세우고 대발과 대발막대라는 스틱을 빌어 氷上渡江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1890년대 중반, ‘빙족희(氷足戱)’라는 이름으로 서구식의 스케이트가 조선에 처음 선보이게 된다. 경복궁 향원정 못 위에서 '얼음 위를 나는 기술'이 무엇인지 궁금해 했던 고종과 명성황후를 위해 외국인들이 시연을 했던 것이다.

영국의 왕립 지리학회 최초 여성 회원이었으며, 1894년~1897년 사이 한국에 머물렀던 이사벨라 버드 비숍 여사는 그의 저서 "조선과 이웃 나라들(Korea and her neighbors)"에서 경복궁 향원정에서 열린 스케이트 파티에 초대를 받아 갔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 곳으로 그녀뿐 아니라 조선에 있는 전체 외국인들이 모여 들었으며, 왕과 왕비는 유럽인들에게 특별한 관심과 친절을 베풀었다고 한다. 그러나 명성황후는 내외의 법도 때문에 향원정에 발을 내리고 밖에서는 보이지 않게 한 채 스케이팅하는 모습을 숨어 구경 하였으며, 남녀가 사당패와 색주가들처럼 손을 잡았다 놓았다 하는 모양에 대해서는 못마땅해 했다고 한다. 이런 기록들로 미루어보아 서구의 피겨 스케이팅이 처음으로 조선에 선을 보인 것이 바로 이때가 아니었나 추측된다.

한국에 근대적 운동경기가 보급된 것은 대부분 대한제국시대(1897-1910) 였다. 주로 황성 기독 청년회(YMCA)의 선교사를 통해서 보급되었는데, 스케이트도 야구나 정구 등 다른 운동처럼 이때 알려진다. YMCA의 회원이었던 현동순이 1904년 미국의 선교사 질레트로부터 스케이트를 구입하는데, 처음에는 그 용도를 몰라 다시 선교사에게 찾아가 물었다고 한다. 얼음 위에서 지치는 것이라는 설명을 듣고 개천에서 타보았으나 처음에는 앞으로 나아가지않아 애를 태웠으며, 각고의 노력 끝에 성공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러나 이 때의 스케이트는 오늘날과 달리 앞뒤가 짤막한 것이었다고 한다. 보통의 구두에 나사못으로 조여 다는 것으로 앞 굽은 굽어져 있고 날 두께가 두꺼워 지금의 피겨 스케이트와 비슷하였다고 하는데 이 이야기는 1929년, 이길용 기자가 동아일보에 연재한 <조선체육계의 과거 10년 회고1>에 기재된 기사로, 그 동안 스케이트 도입시기에 관한 여러 가지 설 중 가장 정확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이렇게 도입된 스케이트는 1910년 들어서면서 일반에게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하고 1920년대에 들어서는 동아, 조선일보등에서 주최한 각종 빙상 선수권 대회, 교내 빙상운동회가 성황리에 열리게 된다. 그러나 주로 스피이드 경기 뿐이었지 피겨 활동은 미미했다. 그러다가 1924년 1월 일본에서 유학 후 귀국한 李一의 주도로 <피규어 스케잇 구락부(F.S.C)>가 탄생하게 된다.

창경원의 작은 연못에서 이일, 연학년, 박영진, 김철용, 박정서, 박명진, 장지원, 박희진, 이렇게 8명이 주축이 되어 만들어졌던 이 모임은 외국 서적을 사들여 피겨에 관해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특히 지금은 종목에서 없어진 스쿨 피겨(컴퍼서리)에 대한 연구를 많이 하였으며 당시 조선인들에게는 생소했던 페어나 아이스 댄싱에 대해서도 알고자 했다. 1924년 2월 <피규어 스케잇 구락부>의 발족 당시의 회원은 8명이었으나 더 많은 회원들이 가세하면서 남자 선수들끼리였지만 페어나 아이스 댄싱도 곧 할 수 있게 되었다(당시 여자 선수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리고 구락부가 발족된 이후 기록상으로는 처음으로 1925년 <제1회 전조선 빙상대회>에서 스피이드 경기 중간에 李一선생의 피겨 시범경기를 갖게 된다. 또한 서울시내 관훈동에 사무실도 내었으며, 1928년에는 용산 철도국 스케잇장에서 동경제대 스케이트 원정단과 피겨 친선경기도 한다.

1930년대 들어서는 경성 의학전문(현 서울의대)이나 경성약전(현 서울대 약대), 세브란스 의전 등에서 피겨선수가 나오고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世專의 경우, 한강에서 교내빙상대회를 열기도 한다. 그러나 일제는 1937년 중일전쟁으로 인해 전시체제로 돌입하면서 오직 전쟁 준비를 위한 체육정책을 펴게 된다. 결국 1938년 7월 4일 <조선 체육회>는 강제해산을 하게 되고 피겨 구락부도 정상적인 활동을 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면서 각 체육 단체들이 활성화되었으며 자연히 빙상계도 활기를 띠기 시작한다. <조선빙상경기협회(대한빙상경기연맹의 전신)>가 발족되었으며, 그 후에 한동안 <조선빙상속도협회(스피이드)>와 <조선빙상형활협회(피겨)>로 독자적으로 분리 운영되어오다가 1947년 6월에 이르러 두 협회는 다시 <조선빙상경기연맹>으로 개칭하게 되고, 마침내 국제빙상경기연맹(I.S.U.)에 정식 가입하게 된다. 그리고 1948년 9월에 <대한빙상경기연맹>으로 다시 한번 개칭하게 되면서 피겨의 원로이신 李一 선생이 초대회장으로 추대된다. 또한 만주 하얼빈이나 북경 등지에서 피겨를 배운 김정자, 홍용명, 서신애, 문영희, 김영배, 장영희 등 여자 선수들이 귀국하면서 활기를 띠게 된다.

그러나 1950년대 들어 한국은 6·25사변으로 또 한번의 큰 시련을 맞게 된다. 특히 최초의 심판카드와 피겨협회 로고를 만든 이세만 선생이 실종되는 등 종전될 때까지 피겨구락부의 활동이 위축된다. 그러나 피겨 사랑이 각별했던 박영진 선생을 비롯한 많은 피겨인들의 일치 단결로 1955년 제35회 동계체전에도 다시 참가하게 되고, 전국 피겨선수권 대회를 열게 되는 등 제 모습을 찾게 된다. 특히 이승만 대통령과 프란체스카 여사의 동계체전 참관은 국민들로 하여금 빙상에 많은 관심을 갖게 해주었으며, 1959년 9월에는 한국 사상 처음으로 미국의 빙상 무용단 <홀리데이 온 아이스 쇼>가 내한 공연하기에 이른다. 이때 국내 여자 챔피언이었던 조정근 선수가 이 쑈 단에 선발, 출국함으로써 한국 초유의 프로 선수가 탄생한다.

1964년에는 피겨 선수들의 오랜 숙원이었던 동대문 실내 스케이트장이 완공된다. 또한 1961년부터 시작한 아이스 카니발도 4년간 계속 공연하여 많은 사랑을 받았으며, 1968년에는 한국 피겨선수로서 처음으로 그레노블 동계 올림픽에 이광영(남), 김혜경, 이현주(여)가 이해정 단장의 인솔로 참가한다. 이렇게 꾸준한 성장을 보인 한국 피겨계는 현재까지 동계 올림픽을 비롯하여 세계선수권대회, 유니버시아드 대회, 세계주니어 대회 등에 많은 우수선수를 파견해왔으며, 1991년에는 삿뽀로 유니버시아드 대회에서 정성일 선수가 2위를 함으로서 한국 피겨 국제대회 사상 첫 메달을 획득한다. 또한 1968년 이병희, 이해정 선생의 국제심판 자격 획득 이후, 국제심판은 다수 있었으나 I.S.U 심판이 없어 국제대회마다 아쉬움이 컸으나 2001년, 이지희 기술이사가 각고의 노력 끝에 선발 됨으로서 앞으로 한국피겨의 위상은 점점 더 높아지리라 기대된다. 또한 박빛나(여) 선수가 이번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동계 올림픽 출전권을 획득함으로써 기술면에서도 많은 발전을 해왔음을 보여주고 있다.

* 편집자 주
* 이 글은 이화여자대학 경제학과 3학년, 이상은 (1992~1994년, 전 피겨 국가대표 상비군)이 지난 2년 6개월 동안 한국 피겨에 대한 자료를 수집, 정리한 <한국의 피겨 스케이팅 100년>중 일부분을 발췌 요약한 것입니다.